시공(時空)의 파편(破片) (4)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한줌의 햇살이 이처럼 따스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카르데키아 산 중턱의 자그마한 동굴에다 둥지를 튼 이후 생존자들이 오늘처럼 거리낌 없이 미명의 햇살을 쬐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 역시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사다크와 제롬의 부축을 받아 겨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에우론은 동굴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널따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카르데키아 산... 니히룸의 도시 엘리카의 서쪽에 위치한 카이노스 대륙의 최고봉... 정상에서는 아득한 남방인 우레시모의 고공 건축물도 관측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없다. 에우론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남쪽 지평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방된 하늘의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이 밝힐 수 있는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그래도 튠과 시린델의 흔적을 찾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옛 사람들의 전언(傳言)을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문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붉게 물든 하늘... 구름 사이로 보이는 손바닥만한 하늘에도 노을이 진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내 본래 이름은 론이었어."

    에우론은 암흑의 구름이 깔린 지평선으로 사라져 가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햇살이 부담스러운지 커다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모두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버지는 우레시모와의 전쟁 때 튠을 위해 싸우다가 두 다리를 잃으셔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셨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나만 남겨둔 채 두 오빠를 데리고 집을 나가셨지. 그땐 날 같이 데려가지 않은 어머니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어."

    땅거미가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본 제롬이 말없이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끌러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고마워."

    자신이 눈뜨기 전까지는 쫓고 쫓기는 관계였었지만 지금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따뜻한 신뢰를 느낄 수 있는 사이가 되어 버린 제롬, 그는 이미 그녀에게 있어 또 한 명의 방패가 생겼다는 것 이상의 든든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난 졸지에 아버지를 먹여 살려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기 시작했지. 그러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나쁜 짓도 많이 하고 다녔어. 취객들 주머니를 털기도 했고... 그러다가 몇 명을 다치게 했는지도 몰라. 죄책감 따윈 없었지. 안 그러면 내가 굶어야 했으니까."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전혀 알지 못했던 에우론의 어두운 과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사다크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 다만 무샨만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난 아버지란 존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어. 점차 못된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거야. 그 사람만 없었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지 않아도 될 텐데... 불순한 생각이 계속 거품처럼 불어나더니 급기야 난 아버지를 죽일 마음까지 품게 됐어. 15살 된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동료들이랑 살인을 공모하고 있었던 거지."

    그녀의 입에서 괴로운 한숨이 베어 나왔다. 말을 뱉기가 망설여졌을 법도 한데 그녀는 자신을 더이상 움츠리지 않으려 했다. 마치 신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처럼, 그래서 보다 깨끗하고 정화된 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묵은 과거의 실타래를 풀어 헤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동료 중에는 거친 녀석들이 꽤 많았어. 그중에 한 녀석이 대뜸 아버지를 죽여주는 대가로 내 몸을 요구했지.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놈들 여럿이 날 범하려하자 사태가 심각하단 걸 깨달은 거야. 내가 왜 동료들에게 마음을 열어 놓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는지 이젠 이해할 수 있겠지? 놈들 역시 나와 함께 몇 년간을 함께 활동해 오던 녀석들이었거든... 그 시간 동안 쌓아 왔던 믿음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난 있는 힘을 다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역시 혼자 힘으론 무리였어."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에우론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잊지 못했다. 그 당시의 충격이 다시금 뇌리 속에 박히는 것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입가엔 야릇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만약 그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자신 또한 없었을 테니까...

    "그때 어딘가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줬어. 그 사람은 날 범하려던 녀석들의 손을 한 자루 레이피어로 모조리 꿰어 놓았지. 덕분에 난 위기에서 벗어났고 그 사람을 따라 며칠간 그가 묵고 있던 숙소에 숨어 있을 수 있었어. 내 신변이 걱정이 된다는 말과 함께 말이야. 처음엔 똑같은 남자일까 봐 걱정도 앞섰지만 이내 긴장을 풀 수 있었지. 놀랍게도 어깨까지 드리운 금발이 인상적인 여자였거든.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샤프리니아·카산드라·어길러스라고 알려줬어."

    샤프리니아라면 우레시모가 튠을 침공했을 때 원정단의 총 지휘를 맡았던 어길러스 장군의 장녀였다. 플루낙스 경비대의 지휘관으로 있던 중 한 남자를 따라 트럼프 평원을 향해 여행을 떠났고 그 후 행방이 묘연해진 걸로 알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미모와 흠잡을 데 없는 품위로 명망이 높았던 카트리오나는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다.

    "난 그녀로부터 한 용사의 영웅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 나랑 눈빛이 많이 닮았다는 말과 함께 말야. 음의 삼각주의 마스터라 불리었던 에우·미셀루앙이란 인물, 그녀가 그 사람과 함께 한 여정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난 자연스럽게 에우란 인물을 동경하게 됐어. 내 이름인 에우론은 바로 그분의 이름과 본래 론이란 이름을 합친 거야."

    에우론은 샤프리니아로부터 전해들은 에우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젊은 나이에 튠의 미르가 사원에서 마법을 계승할 후계자로 낙점 되었고, 또한 시린델의 베르시카 사원으로부터도 와야의 정수를 깨우친 실력자로 인정받은 최고의 마도사... 카이케노스와의 싸움에서 심한 중상을 입었지만 그 궁극의 마물을 쓰러뜨릴 해법을 니히룸에서 찾아 자신의 모든 마력을 거기에 쏟아 부었던 비운의 마스터... 그리고 동료들의 도움을 뿌리친 채 불멸의 신전에서 홀로 카이케노스와 사투를 벌이다 죽어간 용사... 에우론은 그 용사의 자취를 더듬으며 자신도 그 사람처럼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의 내면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신경을 썼던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난 며칠 뒤 다시 길을 나서는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지. 그때 이미 내 마음은 엘리카로 향하고 있었어. 최고의 니히룸 마도사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거든... 하지만 역시 아버지를 혼자 남겨둔 채 여행을 떠날 순 없었어. 그래서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부탁드렸지. 무슨 수를 써서 든 지 매달 생활비를 보내 드릴 테니 잠시만 아버지를 맡아 달라고 말이야. 물론 그 아주머니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해 버리더군. 평소 내 행실도 그랬거니와 이 참에 아예 아버지를 버리려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거야."

    불량배들과 뒷골목을 배회하던 비뚤어진 한 소녀가 지금껏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삶의 거창한 목표를 세웠는데,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려는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장애물이란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당신을 죽이려고 일을 꾸미려 했던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이었어. 싸늘하게 식어 있는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 건... 내 앞으로 쪽지 하나를 남겨둔 채 그렇게 아버지는 생을 마감하셨어..."

    몇 년 째 자리에만 누워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 앞으로 쪽지 한 장을 남겨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기엔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씌어 있지 않았다. 그녀와 아주머니의 대화 내용을 직접 들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귀띔을 해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가 지난 5년 동안 붙잡고 있었던 딸의 발목을 놓아 주기 위해 내린 결단이 다름 아닌 자신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난 엘리카로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흐르는 눈물까지 막지는 못하겠더라고..."

    겉으로는 나직하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분명 속으로는 흐느끼고 있었다. 피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남을 돌아보지 않았던 그녀였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낱 평범하고 나약한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엘리카의 기욜린 사원에서 수련을 쌓으며 에우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내가 피올레타에게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끝까지 계승(繼承)의 로브를 입으려고 했던 것도 실은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그 순간까지 그 옷을 계속 입고 있었기 때문이야. 겉으로는 예뻐서 계속 입는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런 습관까지도 그 분을 닮으려고 노력했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맞는지도 모르지."

    사실이 그랬다. 에우론이 피올레타와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은 이후 다슈의 부탁을 받은 사다크가 직접 우레시모까지 건너가서 티타니움 갑옷을 구해왔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 갑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완강했던 고집은 최후의 순간에 데스피나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만드는데도 일조(一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내 자신이 그토록 닮기를 원했던 에우님과는 자질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어. 평범한 마법사들보다는 성장 속도가 빨랐는데도 그것만으로는 내가 설정한 목표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던 거지. 항상 수도승처럼 사원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해가 바뀌어 갈수록 난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 찌들어 생긴 염증이 서서히 곪아 가고 있다는 걸 더욱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됐어. 바로 그 때였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운명을 결정하게 된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 말야..."

    그녀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 사건... 바로 그녀의 손에 뮤리시아의 펜던트가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 그 뒤를 이었다.

    "한밤중에 사원을 탈출해서 대륙 각지를 떠돌던 중 프리아 마을 근처에서 죽어 가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구해준 적이 있었어. 수많은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이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캘러스에 있는 네이드란 노인에게 전해달라는 말만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지. 그 목걸이가 다름 아닌 뮤리시아의 펜던트... 내 자신의 마력을 극대화 시켜줄 수 있는 비물(秘物) 중의 비물이었기에 난 뛸 듯이 기뻐했어. 쫓기는 신세가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난 내 손안에 들어온 그 운명을 확실히 거머쥐기로 결심했던 거야."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에우의 자질을 방금 손에 들어온 그 비물을 이용해서 보완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것이 왜 사원 밖으로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 왜 네이드란 노인에게 그것을 전해줘야 하는지, 그 사건의 이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 네이드란 노인을 캘러스에서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언젠가 멜세다 조합 소속 상인들을 따라 캘러스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는데 그 여관 주인이 한 눈에 내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알아보더군. 바로 기분 나쁜 인상을 풍기던 네이드라는 노인이었어. 차라리 그걸 빼앗길 바에야 노인을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까지 했었지만 그는 애써 이걸 뺏으려 하지는 않았지. 그 대신 내게 한마디 경고를 남겼어. 죽을 때까지 쫓기는 운명이 될 텐데... 그리고 내가 죽어 버리고 나면 펜던트는 저절로 자신의 손으로 돌아올 거라며... 정말 그랬어. 내가 아무리 이걸 벗어 던지려고 해도 절대 내 몸에서 벗겨지지 않았거든."

    이야기의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아마도 네이드는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냥 동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나타나는 노인이라 통 종적을 잡기가 쉬운 일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때 타란디 법왕청의 군사들이 캘러스로 들이닥쳤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쫓기는 운명으로 들어서게 된 내가 겪은 최초의 마찰이었지. 난 있는 힘을 다해 사지(死地)를 빠져 나왔고 그 과정에서 내 힘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어. 아마도 난 그런 위기를 스스로 즐겼던 것 같아. 여기 있는 제롬에게는 미안한 말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 옆에서 멋쩍은 듯 제롬이 헛기침을 해 댔다. 그 역시 그녀의 손에 의해 죽어간 부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이제 과거의 일로 묻어두기로 한 이상 거기에 계속 연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약간은 이질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추격의 손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함께 여관에 묵고 있던 사다크와 다슈의 도움을 받았지. 참 의외였어. 이 다슈란 사내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조합을 떠나 플루낙스까지 날 따라 왔거든. 첨엔 정말 성가셨어.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봤지. 왜 계속 날 쫓아다니는 거냐고?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다슈의 대답이 말이야... 글쎄 내가 맘에 들었다는 거야..."

    그녀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 그 설레임을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길을 떠난 다슈... 하지만 그녀의 뱃속엔 다슈를 닮은 새 생명이 숨쉬고 있었다. 이제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면 그녀는 또 다른 다슈와 재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슈를 만나 함께 여행하면서 난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게 됐어. 우레시모 지하도에서 옛 튠의 시민들을 이끌고 파괴 공작을 벌이던 메이... 과감한 결단력이 인상적인 여걸이었어. 튠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맨손으로 토르케바인을 때려잡던 윌...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엄청난 괴력이었지. 옴쉬에나 숲에서 화살 하나로 유니킨의 급소를 꿰뚫었던 사냥꾼 봄의 활 솜씨도 예술이었어. 오넴이란 곳으로 갔을 땐 무법천지 마을에 한 도적 무리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선두에는 시퍼렇다 못해 검게 날이 선 사이드를 들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어. 그가 바로 바르가디스야. 그리고 그 사나이로부터 사원을 지켜내려는 와야의 세르쥬도...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인물로 기억에 남아있지. 홀로 그 넓은 사원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다슈와 함께 카이노스 각지를 여행하며 만났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아무런 목적도 없이 시작되었던 여정 속에서 때로는 힘을 모았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했던 소중한 사람들, 무엇을 위해 싸운다는 목표와 겨냥하고 있는 적들은 제각각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엔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엘리카의 카르데키아 산으로 집결했다. 반 우레시모 세력인 튠, 시린델, 엘리카에서 살아온 동료들은 그토록 증오했던 우레시모 편에 서서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적국의 장군인 데스피나와 같이 손을 잡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아이온의 크리슈아와 메터리아의 란느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에우론의 몫을 감당해 낸 피올레타까지... 하나가 되어 싸우고 난 후 함께 영원을 향하여 떠나 버렸다. 내가 아무리 비뚤어진 행동을 해도,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도 그들은 동료란 이름으로 날 따뜻하게 감싸 주었는데... 카르데키아 산으로 향하던 어느 날 밤, 에우론은 비로소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었다. 비록 짧긴 했지만 그 시간은...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토막의 행복을 느낀 적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이곳 카르데키아 산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이었을 거야. 그래서 눈을 떴을 때 그들이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지."

    얼마 전 사다크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제롬의 레이피어 앞에 순순히 목을 내밀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뜨자마자 물밀듯이 밀어닥친 가혹한 현실 때문에 성난 폭풍우가 이는 바다 한 가운데 홀로 던져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그려진 그 바다는 은은한 저녁 햇살과 함께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 에우론은 아득한 남방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넋두리에 묵묵히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후에 한바탕 먹구름과 함께 불어 닥친 큰 폭풍이 있었어. 모든 것을 남김없이 휩쓸고 지나 가버렸지.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을 거라며 한숨짓던 사람들의 절망 어린 표정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해...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비바람이 그쳤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그때와는 다른 얼굴로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아직 채 먹구름이 가시지 않은 흐린 하늘을 말야... 이제 춥고 캄캄한 밤이 찾아오겠지. 새벽을 넘어 먼동이 틀 때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 잠들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잠들 수 없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지...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더 길고 괴롭게 느껴질 지도 몰라. 그래도 그 고통 뒤에 밝아올 아침을 위해 뭔가 준비를 해야 되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어가야 할 시간... 에우론은 아무 말 없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망가진 몸으로 전장을 누빌 수는 없었지만 한마디 말로써라도 이 황량한 세상에 남겨진 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들의 희미한 눈동자에 확고한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설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생존자들이 갈구하는 한줄기 희망에 대한 염원이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넘어야 할 산들이 보이는 것 같아. 예전엔 모두 안개 속에 가려진 것 같았는데... 봉우리가 참 험난하고 높다... 돌아갈 길도 보이지 않아... 하지만 저 산 정상에 우뚝 서면 새롭게 떠오르는 아침 해가 우리에게 휴식을 허락할 안식처를 밝게 비춰주고 있을 거야. 우리 모두가 그걸 보리라 장담할 순 없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장엄하고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면 해..."

    에우론은 대륙 남방을 향해 길게 자락을 내린 카르데키아 산의 지류들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튠과 시린델을 넘어 캘러스로 향하고 있었다.

    "창조주는 깊은 잠에 빠졌지만 언젠가는 우리 앞에 다시 깨어날 거야. 그때... 우리가 다시 만든 이 세상을 보여주자. 우리가 곧 이 세상의 주인이자 창조주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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