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안으로 난입해 들어온 타란디 법왕청의 병사들에 대해 대다수가 중상을 입고 있는 생존자들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그들에게 길을 터주고 말았다.
중장비로 무장한 30여 병사들의 선두에는 그들의 지휘관으로 여겨지는 한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롬, 알키르의 도시 타란디 법왕청의 집행관 피올레타를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기사로, 그가 거느리는 병사들은 모두 도시 상류층의 자제들로만 구성된 품위 있는 정예군이었다.
하지만 항상 기세등등하게 행군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몰골 역시 말이 아니었다.
전신에 검은 재를 뒤집어 쓴 채 여기 저기 피가 튄 자국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명예롭게 휘날리고 다니던 법왕청의 깃발 역시 부러진 깃대 위에 군데군데 찢어지고 더렵혀진 모습으로 힘없이 걸려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부터 여기 피신해 있는 사람들처럼 피로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걸로 미루어 이미 저항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침상 위에 힘없이 앉아 있는 에우론 앞을 사다크가 가로막아 섰지만 법왕청의 군사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대로 그녀가 있는 침상 둘레를 둥글게 둘러싸서 포위해 버렸다.
이제 그녀를 지킨다는 일체의 행위는 무모한 시도가 될 가능성이 짙어졌다. 제롬은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다가선 후 발길을 멈췄다. 그의 눈길에서 예전처럼 약자를 조롱하는 듯한 냉소를 읽을 수 있었다.
"... 나를 잡으러 온 거겠죠?"
모든 것을 체념한 에우론의 말투였다. 이미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던 그녀에겐 이제 삶에 대한 갈망은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모두를 따라 죽었더라면 넋이나마 그들과 함께 있어 외롭지 않았을 것을...
자신을 대신해 죽어간 동료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만 갔다.
"이제 제가 도망갈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 당신들이 찾고 있던 물건이 바로 이거 아니던가요?"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들어 보였다. 뮤리시아의 펜던트, 타란디의 유리엔 사원에 보존되어 오던 이 금단의 비물(秘物)이 에우론에 의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다.
도시의 법왕청은 군대까지 파견하여 그 비물을 찾아오도록 명했으며 그 선두에는 바로 피올레타와 제롬이 있었다.
촉망받던 마도사인 알키르의 피올레타와 흠집 하나 없는 기사도로 무장한 제롬은 그녀를 잡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카이노스 대륙을 횡단하는 대장정을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죠?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이 펜던트는 그 주인이 숨이 끊어지기 전엔 결코 그 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로 제가 돌려드리고 싶어도 지금까지 계속 지니고 다녔던 이유이기도 하죠.
그러니... 절 죽이세요."
그녀는 제롬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독백하듯이 자신의 대사를 읊조렸다. 역시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고 무샨의 독설은 결국 효과가 없었던 셈이었다.
모든 것을 초탈해버린 그녀의 태도에 사람들은 저마다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곧 제 친구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오히려 기쁜 일이죠."
그녀의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본래 내가 있던 곳,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후회는 없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실망 어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시선들을 뒤로 한 채 그녀는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곧 새로운 시작이 다가오겠지...
언제부터인가 꼬이기 시작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금에 와서야 후회하게 되었다. 그때는 마냥 설레고 아무리 힘들어도 즐거웠었는데... 죽음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철이 들어 버린 한 소녀의 움켜쥔 두 손은 신 앞에 기도드리는 수녀의 간절함이 베어 있었다.
제롬은 말없이 자신의 레이피어를 뽑아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차가운 칼날의 감촉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지는 듯 했다.
"음..."
레이피어를 쥐고 있는 제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칼날이 맞닿아 있는 그녀의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이런, 제길!"
제롬이 느닷없이 자신의 레이피어를 땅에다 내려 꽂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레이피어의 날이 바위에 부딪치며 한 차례 섬광과 함께 부러져 버렸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동굴 안의 생존자들은 제롬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에우론은 느닷없는 굉음에 놀라 살며시 눈을 떴다. 그의 분노에 찬 눈길이 그녀에게 내려 꽂히고 있었다.
"왜... 목숨을 버리려고 하나? 예전처럼 우릴 골탕먹일 때의 그 드높던 기세는 다 어디로 숨어 버리고!"
솟구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제롬이 상기된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승자의 여유, 그런 것이 있을 법도 했지만 지금의 그에게선 그런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동료들에게 내 몫을 주지 못했어요."
"몫이라고?"
에우론의 답변은 이전에 제롬이 알던 거만함을 조금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상냥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제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저도 그들과 함께 목숨을 던졌더라면 세상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거든요. 죽어 가는 그들을 살리지도 못했구요."
갑자기 제롬이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사다크가 제지하려 했지만 그 역시 병사들의 저항에 부딪혀 손을 쓸 수 없었다. 제롬은 맹수가 자신의 사냥감을 요리하듯 거칠게 그녀의 목을 잡고 흔들었다.
"그래,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우린 피올레타님과 함께 좋든 싫든 타란디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 젠장, 넌 언제나 그랬어. 항상 우리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었지.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뭐냐고!"
그랬다. 항상 제롬의 앞에 서서 이 기사단을 지휘하던 알키르의 피올레타... 휘황찬란한 은빛으로 단련된 갑옷을 걸치고 에우론과 마법 대결을 벌이기도 했던 숙명의 라이벌.
언젠가 두 사람이 각각 자신들의 궁극의 주문으로 자웅을 겨룬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계승(繼承)의 로브를 입고 있던 에우론이 중상을 입었고 결국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지(死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치명타를 가했던 그 피올레타가 지금 제롬의 곁에 없었다.
"그럼... 설마?"
"그렇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닐·카이케노스의 가공할 폭발 속에서 생존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남기기 위해 스스럼없이 목숨을 던진 동료들... 그 속에 자신을 대신해 쫓고 쫓기는 앙숙이었던 피올레타도 있었단 말인가?
"네 몫은 우리 피올레타님이 충분히 하셨어!"
제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최후의 사투라고 일컬어지는 카르데키아 전투... 그 마지막 순간에 에우론의 공백을 대신 매운 것은 다름 아닌 피올레타였다.
그들이 이룩한 '하늘의 해방', 그 이면에는 바로 그녀의 희생도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한 몸부림 앞에선 결국 적(敵)이란 단어도 그 의미를 잃어 버렸다.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제롬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그는 자신의 울분을 견디지 못한 채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어. 그건 여기 있는 내 부하들도 마찬가지야. 넌 우리가 잡아야 하는 한낱 죄수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
"우리는 모두 피올레타님의 명령에 죽고 사는 기사들, 그 분의 유명(遺命)을 받들지 않을 순 없다."
이 말까지 끝낸 제롬이 스스럼없이 에우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따르는 병사들도 일제히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물론 당사자인 에우론조차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전 죄인입니다. 당신들이 처단해야할 의무가 있는 죄수라고요."
그녀는 지금 보이고 있는 제롬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많은 병사들이 그녀를 뒤쫓다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 직접적인 피해는 암흑 에너지에 의한 것이었고 그 에너지의 근원은 바로 에우론이 사용하는 갈리노스·듀카인 스태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용서할 수 없는 적을 눈앞에 두고 그는 그대로 부복(俯伏)한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피올레타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적이란 용어가 무의미한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너희들은 에우론을 찾아가 날 섬겼듯이 그녀를 섬기도록 해라.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는 바로 에우론이니, 너희들 모두 그녀와 함께 싸워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피올레타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남긴 유언, 에우론에겐 그 내용 자체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 원수처럼 목숨을 노리던 과거를 묻어둔 채 그런 결단을 내린 피올레타의 냉철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난 항상 그녀를 죽일 기회만을 노렸었는데... 그러기만 했었는데...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이상 피올레타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마십시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분은 이제 당신 밖에 없습니다.
에우론님, 당신은 우리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유일한 지도자, 이 카이노스 대륙에 다시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 그 날까지 우리들은 목숨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제롬의 비장한 결의 뒤에 그를 따르던 군사들이 일제히 복명(伏命)하고 나섰다. 이로써 그들은 새로운 충성의 대상을 피올레타에서 에우론으로 옮겼다. 그 동안 쫓고 쫓기던 이전의 묵은 관계가 청산되고 새로운 주종관계가 형성된 것이었다.
동굴 안의 생존자들은 저마다 든든한 보호자들의 등장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떠한 괴물이 앞을 가로막아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결국은...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건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에우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죽을 때는 지금이 아닌가봐. 내가 죽으면 같이 죽어야 할 사람의 수가 더 늘어나 버렸잖아."
에우론의 입가에 약간은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들의 동료들, 그리고 피올레타에게 감사했다. 아무 보잘것없었던 자신을 이렇게 중요한 사명을 수행할 인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원망이 앞서지 않았다.
그 증거로 그녀가 사람들 앞에 환한 웃음을 띈 채 말을 이었다.
"제 친구들, 그리고 피올레타의 뜻이 뭔지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그들 곁으로 돌아갈 때는 바로 이 카이노스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그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역시 날 웃는 얼굴로 맞아주겠죠. 그 날이 올 때까지... 저는 여러분들 앞에 서서 싸워 나가겠습니다."
"에우론님!"
동굴 안 여기저기서 감정을 이기지 못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자신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구심점이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한 안도의 표출이었다.
에우론이 눈빛으로 곁에 있는 사다크와 제롬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절대 날 버리면 안 돼.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내게 힘을 빌려주는 거야. 그럴 수 있지?"
"물론입니다!"
사다크와 제롬은 그렇게 그녀 앞에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 순간 생존자들과 병사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세상이 멸망하고 일주일... 그들에게 그 이후 이토록 기쁘고 가슴 벅찼던 시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갈 세상이 이제 그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무샨, 부탁이 있어."
에우론이 그녀 곁에서 흡족한 미소를 띄고 서 있는 무샨을 불렀다. 항상 자신들에게 불길한 내용만을 전했던, 그래서 같이 있는 것조차 꺼려했던 엘리카의 예언자...
하지만 이제 그 무샨도 함께 싸우는 동지가 되어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밝고 희망적인 예언만 전해 줘. 더 이상 절망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지도자시여..."
항상 굳은 표정만 지어 보였던 무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런 그녀의 두 손을 에우론이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사람들의 밝은 모습들 속에서 에우론도 예전의 활기찼던 자신의 모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 그때보다는 어른스러워진, 철이 든 모습으로 그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살아가야한다... 그녀의 가슴속에 새로운 각오가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내 친구들이 가져다 준 해방된 하늘이 보고 싶어... 다시 한 번...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