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時空)의 파편(破片) (2)



    "헉!"

    숨이 넘어갈 듯한 가쁜 숨소리와 함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것이다. 그녀의 온 몸은 간밤에 흘린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였다. 아직 눈앞의 사물조차 분간해 내긴 어려웠지만 자신의 몸이 어딘가에 뉘어져 있다는 사실만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그녀는 연거푸 커다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오, 신이시여... 드디어 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다면 난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여길 보세요,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오오... 정말인가?"

    주위에서 던지는 말들이 울리는 걸 보니 여긴 동굴 안인가 보다. 빛다운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그녀는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에우론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네?"

    누군가가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탓인지 그 손길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베어 나왔다.

    "에우론님, 저 멜세다 상인 조합의 사다크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사다크라 자신을 밝힌 이 건장한 중년 사내는 감격에 겨웠는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연신 굵은 눈물 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덩치가 곰 같이 컸던 사내, 그래서 언제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믿음직스러웠었지... 그녀의 몽롱한 머리 속에 그 사내와 함께 대륙을 횡단하던 한 수려한 청년의 잔상이 그려지는 듯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 이상 그녀는 그 청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래 사다크라면 내가 잊을 수 없지... 잊을 수가 없어...

    "... 삼촌이구나..."

    그녀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파랗게 질리고 갈라진 입술엔 말라비틀어진 핏자국들이 남아 있었고 고왔던 피부도 군데군데 검게 그을리고 벗겨져 있었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온몸 여기저기서 통증이 전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놓여진 주위를 살피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려 보려 노력했다. 자신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중년 여인네들과 낯이 익은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는 캘러스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네이드란 노인도 있었다.

    "... 여기는... 어디?"

    희미했던 눈동자의 초점이 어느 정도 잡혀가면서 자연스레 내뱉은 질문이었다. 흩어졌던 시간의 파편들이 하나 둘 씩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자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기억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음산한 분위기의 넓은 홀 뿐, 이런 캄캄한 동굴 속은 아니었다.

    "카르데키아 산속의 한 동굴 안입니다. 저희들의 힘이 모자라 이런 궁벽한 곳으로 밖에 모시지 못한 점 너그럽게 헤아려 주십시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는 네이드를 대신해 사다크가 양해를 구하고 나섰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구심점은 사다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대하고 있는 네이드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인물이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마디 언질조차 주지 않는 노인. 그러다가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냥 기분 나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써 놓은 일기를 한 번 쭉 훑어보는 것처럼... 이미 백 살을 훨씬 넘긴 산송장이란 소문도 파다하게 나돌고 있어 가까이 대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노인.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부옇게 퍼져 보였던 물체의 잔상들이 점점 또렷해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어느 한 점을 향해 고정되었다. 역시 낯설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 저 갑옷..."

    그녀의 시선 끝에 심하게 파손된 퓨로 플레이트 흉갑이 놓여 있었다. 항상 성능보다 예쁘고 화려한 방어구만 골라 입었던 그녀에겐 저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어본 기억이 없었다. 지난 전투의 상흔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 얼마나 치열한 사투를 치러냈는지, 보기 흉한 몰골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한 그 흉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알 수 없는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그녀의 동료들 중에서도 그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전사가 있었다. 어떤 거대한 괴물도 그가 한 번 허공을 가르며 내려 꽂는 창끝을 견뎌내지 못하고 타오르는 폭염에 휩싸여 쓰러져 갔다. 그는 항상 여러 동료들 중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단 한 번도 자신들 앞에서 적을 향해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강인했던 동료가 죽었을 거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 피어오르기 시작한 의문을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덮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갑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시 혼자의 힘으론 무리였다.

    "아직 움직이시는 건 무리입니다. 저걸 가져오라는 말씀이시죠?"

    사다크가 애써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를 다시 눕히며 말했다. 그녀의 입 속에선 여러 토막의 말들이 맴돌고 있었지만 침상에 몸을 내맡기는데서 오는 고통에 가려져 미쳐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못했다. 앉아 있기라도 하고 싶어... 누워 있다는 건... 다쳐서 누워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약한 모습이니까...

    "그래도... 몸을 일으키고 싶어... 누가 나 좀..."

    에우론은 주위에서 그녀를 보살핀 듯한 한 중년 여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몸을 침상에 기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지럽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만져 주는 그녀의 옷은 온통 검은 먼지투성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다크가 자신의 품에 안겨준 퓨로 플레이트 흉갑 역시 시커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에우론은 조심스레 흉갑을 살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 동료의 흉갑 목 뒷부분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가 찾는 그 부분은 이미 파손되어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 흉갑의 주인이 궁금하십니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며 뱉은 말이었다.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나이가 지긋한 노파가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귀에 전해진 느낌은 예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불길함 그 자체였다.

    "우레시모 6전기(戰騎) 중의 꽃이라 불리었던 데스피나님, 기억나십니까?"

    "... 데스피나?"

    에우론은 지팡이를 짚은 채 측은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노파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노파는 바로 그녀의 동료들에게 세상의 파멸을 예언했던 엘리카의 예언자 무샨이었다. 아직 사태의 추이를 알지 못하는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노파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에우론님이 뒤집어 쓰고 계신 먼지, 여기 피신해 있는 모든 이들의 몸을 검게 덮어 버린 이 먼지를 우리 생존자들은 암흑의 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에 엄청난 재앙이 지나간 후 남겨진 잔재죠."

    "...?"

    먼지... 생존자... 암흑의 재... 그리고 엄청난 재앙... 귓속에 차례차례 박히는 비수 같은 단어로부터 방금 자신이 보았던 네이드의 거슴츠레한 눈빛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꿈속에서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노파의 암시를 통해 방금 빠져 나왔던 악몽을 처음부터 되짚어보려 노력했다. 자신이 꿈속에서 본 것은 바로 세상의 종말이 아니었던가? 이 세상을 창조한 신조차도 외면해 버린 버림받은 곳의 최후...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이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무샨의 혀는 그런 그녀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대지는 요동을 쳤고 타오르는 불길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살라 버렸습니다. 바다에선 엄청난 물보라가 일어 대륙을 휩쓸었으며 가공할 위력의 광풍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기절한 이후의 일들을 방금 꿨던 꿈에 의해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뿐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샨은 자신이 꿈속에서 본 내용들이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라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주위에 서 있는 혹은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몰골은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바로 주체할 수 없는 무기력 그 자체였다.

    "지상에 있던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데오너지의 힘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리던 우레시모도, 그 우레시모의 영광을 좇으려던 캘러스도, 마지막에 우레시모를 배반하고 세상의 멸망에 동조했던 엘리카조차도 자신들의 파멸을 돌이킬 순 없었죠. 돌이켜 보면 다 부질 없는 싸움들, 절대적일 거라 믿었던 섭리와 명분들 모두 종국에는 암흑의 구름에 둘러 싸여 그 의미를 잃어 버렸는데 말이죠. 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한다... 세상이 멸망한 것이라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처참한 현실에 대한 그녀의 수긍뿐, 에우론은 이제 무샨이 설명한 세상의 파멸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최후의 싸움에서 그녀의 동료들은 자신을 제외시키면서까지 꼭 승리해 보이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잊을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녀는 사다크가 자신에게 안겨 준 퓨로 플레이트 흉갑을 품에 안은 채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모두들 나와 약속했는 걸. 꼭 이겨 보이겠노라고 약속했다고... 나 없이도... 내가 없어도 해낼 수 있다고 말야..."

    "그분들 모두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처절했던 카르데키아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는 당신이 유일하십니다. 무려 일주일 전의 일이었죠."

    "..."

    "그 흉갑은... 그 흉갑은 바로 데스피나님께서 최후의 순간에 당신을 우리들에게 맡기시면서 친히 벗어 입혀 주신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 말이죠."

    "... 뭐라고?"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스피나, 언제나 과묵하게 입을 다문 채 핏기 없는 얼굴로 전장을 누볐던 여전사. 우레시모 6전기(戰騎) 중 3중기(重騎)의 꽃이라 불렸던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에우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갑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항상 예쁘고 화려한 옷만 골라 입어 온 철없는 그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셈이었다. 결국 그녀의 성치 않았던 몸은 자신이 분신처럼 다루던 홍염의 파티샨과 함께 산산조각 나 버렸다.

    "데... 데스피나... 왜 그런 짓을...?"

    데스피나가 죽었다. 그것도 무려 일주일 전의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난 지난 일주일 동안 날 대신해서 목숨을 버린 그녀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지 못한 채 마냥 잠만 자고 있었던 거란 말인가?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이 한꺼번에 교차하면서 참을 수 없는 울분으로 휘몰아쳤다. 에우론은 데스피나가 자신에게 입혀줬다는 그 흉갑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냉정한 판단으로 위기에 빠져든 동료들을 구해 내던 데스피나, 사소한 정 따위에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던 냉철한 데스피나였는데... 에우론은 문득 최후의 싸움 목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그때 그 순간,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선명하게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꿈속에서 누군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다슈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해.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더 이상 너희 가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진 않겠어.
대신 에우론, 넌 반드시 살아 남아서 이 버림받은 세상에 남겨진 자들이 다시금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다오.
우리들이 목숨을 바쳐 해방시킬 저 푸른 하늘을 네가 품고 있는 새 생명이 볼 수 있도록... 그것만 약속해 줘.'

    에우론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번졌다. 그녀와 함께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들은 데스피나가 최후의 순간이 임박했을 무렵 남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죽었다. 멜세다 상인 조합의 한 짐꾼에서 늠름한 용사로 성장했던 연인 다슈도, 튠의 재건을 위해 우레시모에서 파괴 공작을 주도했던 눈보라의 메이도, 맨손으로 토르케바인을 때려 잡던 트럼프 평원의 거한 윌도, 오넴 마을을 주름잡던 도적들의 우두머리인 사이드의 명인 바르가디스도, 옴쉬에나 숲의 유니킨 사냥꾼 봄도, 베르시카 사원의 수호자였던 와야의 세르쥬도, 같이 손잡고 싸운 날이 길지 않았던 최강의 마도사들, 아이온의 크리슈아와 메터리아의 란느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염려해준 데스피나까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동료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씩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자신의 힘을 한 번 과시해 보려고 시작했던 여행, 아무 것도 모르고 마냥 앞만 보고 내달리려 했던 시간들이었는데... 이제 내게도 행복이란 단어가 낯설게 만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순간들이었는데... 그 행복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 현실이 미웠다. 아니, 뼈 속에 사무칠 정도로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스스로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암흑의 구름 속으로 한 줌의 햇살이라도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셨습니다. 그 결과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던 암흑의 구름들 사이로 한 지경의 구멍을 뚫어 놓는데 성공했고 그 지경 사이로 다시금 빛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셨죠. 이것이 바로 그분들이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해방'입니다. 이제 그 다음 차례는 바로 에우론님이십니다."

    아직 슬픔에 사무쳐 고개조차 들 힘을 잃어 버린 에우론의 등 위로 무샨의 장황한 설교가 쏟아졌다. 이 노파의 논조는 제법 위엄에 설득력까지 갖추었지만 눈뜨자마자 폭풍처럼 불어 닥친 충격으로 중심을 잃은 그녀의 이성에 먹혀 들지는 미지수였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던 그녀의 흐느낌이 멎었다. 그리고 그 흐느낌의 끝은 눈 깜박할 사이에 적막을 가르는 웃음소리로 이어졌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먼저 앞서 가신 분들의 유지를 이어 받아 암흑의 구름으로부터 이 카이노스 대륙을 해방시킬 분은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용사는 당신 외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나 밖에 없다...? 나 밖에 없다고?"

    귀에 거슬릴 정도로 소란스러웠던 웃음소리가 잦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웃음의 끝은 오래지 않아 독기 서린 일갈로 메아리쳐 돌아왔다.

    "나 혼자서 뭘 어쩌라고!"

    느닷없는 에우론의 고함소리에 무샨은 그만 할 말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주위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9명조차도 감당하지 못했던 일을 나 혼자서 떠맡으라고? 곧 배가 불러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내가? ... 날더러... 뭘 어쩌라고!"

    이성을 잃고 날뛰는 에우론의 모습은 더 이상 예전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옆에서 사다크가 보다 못해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진정하십시오, 에우론님. 아직 실감이 나지 않으셔서 그런 겁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신 겁니다."

    이때 급작스런 사태가 벌어졌다. 에우론이 느닷없이 사다크의 허리춤에 차여 있는 단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다크가 재빨리 그녀의 팔목을 붙잡아 해를 입는 건 면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사람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이러시면 안됩니다."

    사다크가 죽을 힘을 다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으로부터 단검을 뺐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다.

    "모든 게 나 때문이야. 내가 있었더라면... 내가 힘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이 뱃속의 아이 때문에... 이것 때문에 나만 구차하게 살아남고 나머지 동료들이 대신 목숨을 버린 거라고. 이 하찮은 나 때문에... 이대로는 더 이상 괴로워서 살 수 없어. 부탁이야. 날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 제발 이 손 좀 놓아 달라고!"

    에우론이 눈물로 애걸하며 사다크에게 매달렸다. 항상 곁에 있었지만 한번도 그녀의 망가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그는 이 민망한 사태를 수습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검을 쥐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을 꽉 붙들어 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죽으면 우리 모두 죽어야만 합니다."

    "...?"

    무샨의 거창한 예언이 또 시작되려나 싶었다. 그래 지금까지 정말 신물나게 들어온 말투지... 이젠 정말 지겹다구.

    "여기 있는 자들의 몰골이 보이십니까? 열에 예닐곱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입은 자들입니다. 모두 지난 일주일 동안 흉폭하게 변한 괴물들로부터 당신을 지켜내기 위해 싸운 자들이기도 하구요. 왜 도망가지 않고 그랬을까요?"

    "..."

    에우론은 여전히 단검을 쥐고 있는 손에서 긴장을 풀지 않은 채였다. 그녀의 붉게 충혈된 두 눈 사이로 들어온 무샨의 얼굴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간절함이 베어 있었다. 그녀는 감히 그런 무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가쁘게 내몰아 쉬는 거친 숨소리가 더욱 더 크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당신이 우리들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멸망한 이후 세상 밖으로 퍼져 나온 암흑의 기운 때문에 포악해진 괴물들과 싸워 온 사람들이 믿는 건 이제 오로지 당신 밖에 없습니다."

    "..."

    "이자들의 눈빛을 보십시오.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수많은 눈빛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가슴 졸이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가운데서도 간절하게 소망했던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이 절박한 상황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이었단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버린다면 우리는 얼마 안 가 동굴 안으로 스며든 괴물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대신, 당신이 우리들을 지켜 주신다면, 당신이 우리들의 앞에 서 주신다면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당신을 도와 세상의 희망을 위해 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목숨마저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당신마저 이들로부터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를 꺼뜨려 버릴 생각이십니까?"

    단검을 쥐고 있던 그녀의 오른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의 동요를 눈치챘는지 사다크는 억지로 단검을 뺏으려 하지 않았다. 예민해진 그녀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보게. 아직 에우론님에겐 시간이 필요하네. 그만 하시게나."

    더 이상 그녀를 몰아붙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미 검을 내려놓은 에우론을 감싸 안으며 내린 사다크의 판단이었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심경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급작스럽게 닥친 현실과 가혹한 운명...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한 최선의 처방은 바로 시간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던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무샨은 자신의 기대와는 상반된 그녀의 반응에 실망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에겐 지금 그럴 여유가 없는데...

    "예전의 당신이었더라면... 이란 가정이 이토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다슈님이 전사하셨을 때조차도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말이죠. 그때의 독기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

    지나치리만큼 냉정한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다. 에우론과 다슈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도 민망한 말인데 하물며 당사자의 심경은 오죽이나 할까... 하지만 무샨의 말 중에 틀리거나 과장된 내용은 단 한 구절도 없었다. 모두가 다 이미 검증된 사실이었다.

    "부디 먼저 목숨을 버리신 분들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길 빌겠습니다."

    무샨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 했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더 이상 그녀를 지켜낼 여력이 없는데... 아니, 우리를 지켜줄 사람은 바로 그녀 외엔 없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당신을 보호했으니 이제부터는 당신이 우리를 보호해 달라... 생각하기에 따라선 졸렬할 정도로 이기적인 발상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외에는 대안이 서지 않았다. 그때 깜짝 놀란 무샨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않고 말았다. 다급하게 동굴 안으로 뛰어든 한 남자 뒤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노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신속하게 동굴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이런 제길, 타란디 법왕청 놈들이잖아!"

    사다크가 실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의 계속된 전투로 모두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 이들이 중무장한 저 병사들과 맞서서 이길 승산은 없었다. 그들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결코 뺏겨서는 안 되는 사람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

    "타란디 법왕청이라..."

    에우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눈을 뜬 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바로 자신의 쫓기는 운명...

    '그래, 사건의 발단은 바로 이것이었어.'

    그녀의 손에 쥐어진 뮤리시아의 펜던트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Back to the list ~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This work is licens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NoDerivatives 4.0 International License.
この 作品 は クリエイティブ・コモンズ 表示 - 非営利 - 改変禁止 4.0 国際 ライセンスの下に提供されています。